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그만 침공 (문단 편집) == 결과 == 작전은 15일 새벽 은폐를 위해 국적 마크를 지운 [[A-26]] 공격기[* 이 기체는 당시 쿠바군의 주력기이기도 했는데 쿠바에 친미 정권이 들어섰을 때 도입된 것이다.]들이 쿠바 공군기지들을 공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은폐를 했든 안 했든 어쨌건 간에 미군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 되는 쿠바 공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계획했던 2차 폭격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미 1차 공격을 가했는데 한 번 폭격한 공격기가 바로 보급을 마치고 재차 폭격을 가하면 뒤에 [[미국|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애초에 '''CIA가 구상했던 스토리 설정'''은 '카스트로 정권에 반기를 품고 있던 쿠바 공군 내의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 군시설을 폭격하고 미국에 귀순한다' 는 것이었다. 작전에 사용할 항공기로 많고 많은 폭격기 중에 하필 A-26 공격기를 고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망명자'들이 탄 군용기가 미국에 귀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재무장하고 다시 폭격에 나선다면 모양새가 너무 이상하다는 것.] 뒤에 미국이 있는 것은 전세계가 다 알았지만 일단 눈 가리고 아웅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심각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는 상륙군에게 미 공군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중 지원을 할 준비를 했지만 작전 하루 전에 취소되었다. 보고를 들은 후 길 패트릭 국방차관[* 맥나마라는 부재중이었다.]에게 한 말이 바로 문서 맨 위의 인용문이다. 나름 준비와 각오를 마친 카스트로와 쿠바 정부는 전면전을 선포해 전군을 물론 자국 국민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반정부 성향을 지닌 인사 약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카스트로와 [[KGB]]의 주도 하에 훈련을 받은 쿠바 내무부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사전에 차단당했다. 17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상륙부대는 피그만에 상륙을 시작했다. 쿠바군은 상륙부대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최정예 [[공수부대]]와 [[T-34-85]] 20대로 이루어진 전차 대대를 선봉에 세워 반격해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상륙해오는 부대도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부대들이라 쿠바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 공식적인 발표로는 전사자 170여 명이지만 사상자를 포함한 수는 발표되지 않았다.] 10배가 넘어가는 병력의 차를 어쩔 수는 없었고 미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 전달이 늦어지면서 오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앞서 언급한 이유로 못 온 것도 있다. 정치적 이유로 후속 지원이 계획상에서 틀어졌고 상황 판단 미비로 계획의 융통성 있는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에 쿠바 공군은 공습에서 살아남거나 피해를 입은 비행기들을 긁어모아 최대한 빠르게 수리하여 출격시켰다. 쿠바 공군은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쿠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2506여단은 10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쿠바 군인들 사이에 몰래 숨어서 탈출하려던 단원도 있었지만 그가 껌을 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장교에게 잡혔다.] 카스트로 정부는 재판을 통해 주동자들을 처형했고 미국은 5,300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전에 체포되었던 반정부 인사들도 덤으로 숙청당했다. 훗날 2506여단을 기리기 위해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에 피그만 전시관[* 다른 이름으로는 2506 여단 전시관(Brigade 2506 Museum).]이 건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